관료의 책임
요즘 나라가 몹시 혼란스럽다. 이와 관련해서 너무나 많은 말과 글이 넘쳐 나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 꼴이 이 모양이 된데 대해 관료들도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며칠전 5공화국에서 전두환이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해서 군은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맞는 말이지만 하는 사람이 그래서 인지 조금 거시기하다. 하여간 관료도 마찬가지이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따라서 정통성을 가진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여야할 것이다. 이 말은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소극적인 의미도 있지만, 대통령이 옳바르고 효율적인 정책을 펼 수 있도록 밀어주어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부문을 잘모르기 때문에 내가 그런대로 좀 안다고 할 수 있는 국제관계쪽 이야기를 하겠다. 외교와 국익의 관계를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국제적인 회의나 행사가 있을 때 불참하면 무조건 손해이다. 참석만 하여도 본전이라고 할 수 있다. 참석해서 발언을 하고 그 말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그만큼 이익이다.

DJ 시절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활발할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DJ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위상과 예상보다 빠르게 IMF사태를 극복했다는 경제적 성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DJ의 개인적 관심이 대단하였다. 동티모르, 소말리아 등에 UNPKO활동에 참여했고, 아웅산 수지여사의 가택감금에 대해서 국제적인 주의를 환기했고, ASEM회의같은 큰 국제회의를 국내에 유치하였다. 무엇보다도 ASEAN과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여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합의했고, 우리나라가 주축이 되어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대한 기초연구가 이루어졌다. 올해 12월에 제 1회 동아시아정상회의가 개최될 예정인데, 이 회의의 기본이 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우리나라가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확 올라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대통령이 관심을 기울인 사항이었기에 외교부 아태국장이 담당해야할 일을 외교부 차관보가 나서서 직접 챙겼다. 차관보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우습게 볼지 모르나 우리나라 차관보의 위상은 대단하다. 장관, 차관에 이은 외교부의 3인자이고, 장관 차관이 원체 다사다망하기 때문에 사실상 외교부 업무의 대강을 책임지는 중요한 직위이다. 우리나라 정도 되는 국가라면 외교부는 당연히 복수차관, 복수차관보제를 운영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DJ가 퇴임하고 참여정부가 출범하자 새 대통령은 동아시아보다는 동북아에 관심을 기울였다. 동북아를 제목으로 한 많은 정책구상과 동북아시대위원회라고 하는 대통령 자문위원회도 만들었다. 자연히 동아시아문제는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동아시아정상회의 준비를 위한 많은 회의에서도 참석하기는 하는데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동아시아를 주제로한 프로젝트 발족도 사라졌다. 동아시아 정상회의는 이제 외교부 동남아과장 정도나 챙길까?

여기서 관료의 책임문제가 생긴다.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전력을 기울이고, 대통령의 관심이 멀어졌다고 해서 업무를 방기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사극에 보면 임금은 만기를 친람한다고 한다. 그만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현대의 대통령은 특히 우리나라 대통령은 아마도 과거 임금보다도 해야할 일, 알아야할 일이 수십, 수백배는 많을 것이다.

대부분의 대통령제 국가에서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국제분야에 정통할 것을 기대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 일은 적어도 외교부 장관이나, 국방부 장관, 주미대사나 유엔대사 같은 자리를 거친 사람이나 간신히 감을 잡을 수 있는 일이다. 정치인 출신은 국내문제에는 밝을지 몰라도 외교안보문제에 대해서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솔찍히 장성급 정도되는 고위군인들끼리 국방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옆에서 듣고 있어도 무슨 말인지 한마디도 모를 때가 다반사일 것이다.

국내문제도 사실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여러가지 각종 정책을 개혁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지만, 우리나라 관료들이 어디 아프리카나 중남미 관료들도 아니고 현행정책의 문제점을 누구보다도 관료들이 잘 알고 있다. 민간에서 주장하는 것도 대부분은 이미 검토를 하였으나,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에 채택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알면서도 부작용이 두려워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이러한 일들-지금까지 진행되온 일, 앞으로 해야할 일,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 등을 보고해야 한다. 대통령의 관심이 다른 곳에 있다고 보고조차 하지 않으면, 나라 꼴을 어떻게 될 것이며, 대통령이 어느날 갑자기 뒤통수를 맞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요즘 나라 안밖이 시끄러운 것은 많은 관료들이 어디 한번 잘해보라 팔짱끼고 냉소를 지으면서 복지뇌동, 면종복배하고 있는 것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비위를 맞출 생각만 하지 말고 비록 대통령이 싫어할지 몰라도 가감을 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보고를 해서 대통령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꼴보기 싫고 이름도 거론하기 싫은 전아무개가 며칠 전에 또 이상한 소리 한마디 했는데, 대통령은 학력은 고졸일지 몰라도 사법고시를 패스한 사람이다. 요즘처럼 1000명 단위로 뽑는 사법시험이 아니라 1년에 불과 몇십명밖에 합격자가 없었던 시절이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못갔을뿐 최고의 명문대학을 골라서 갈 수 있을만한 우수한 두뇌이다.

참여정부가 역사적 소임을 다해내지 못한다면 그 책임의 적어도 절반은 관료들이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작년 탄핵정국때 전국의 민초들이 자신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고 울부짖었다. 이탈리아는 극심한 정국혼란에도 불구하고 관료조직이 탄탄해서 선진국의 지위를 유지했다고 한다. 국민과 후손과 역사에 부끄럽지가 않는 관료가 되어야할 것이다.
by 서산돼지 | 2005/06/13 22:41 | 내 생각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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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玄修 at 2005/06/14 01:31
뭣 좀 해보려다 돈 떼이는 것들도 야단 맞아야 합니다만, 아무 것도 안 하려는 것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ㅡㅡ;;
Commented by 별도 at 2005/06/14 16:32
맞는 말씀이십니다....
오랜만에 들렸는데, 정말 옳으신 말씀만 하시니, 자주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Commented by 머미 at 2005/06/15 10:10
엘리트들을 엘리트 대접을 하지 않으면 자연히 팔짱을 끼게 되겠죠. 이 정권의 큰 문제(뭐가 가장 큰 문제인지도 이젠 모르겠습니다) 중 하나는 엘리트, 혹은 전문가의 가치를 모른다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안모군 at 2005/06/15 11:00
기술관료는 기술관료로서의 책무와 권리가 있죠. 기술관료는 어떤 제기된 상황에서 가장 최적을 찾지만, 그것이 모두가 생각하는 그 방향이라는 보장은 없는 법이니까요. "민의"라는 말이 존재하는 이상에는 최적과 최대공감 간에는 간극이 있게 마련이죠. 정치의 비합리성에는 종종 뜨악한 일이 많기는 하지만, 그런 방향제시자가 없는 경우라면 독재정권보다 나을 게 없는 셈이죠. 하지만 누가 우위냐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겠죠.
뭐 요즘 보면 엘리트가 엘리트인지, 민의라는게 정말 민간에서 나오는 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 좀 잦기는 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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