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행성
나는 르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SF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1순위는 르귄이라고 광고를 하는데, 여태까지 내가 읽은 르귄은 좀 무덤덤하다고나 할까 그다지 재미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 책이 나오고 한참 뒤에 책방에서 실물을 처음 보았을때 첫 인상은 제작비 아낄려고 저질 종이를 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장에 써있는 문구를 본 순간 어떤 필이 오는 것을 느꼈다. 뒤장에 쓰여진 문구는 이렇다.


1000년도 넘게 고향별과 소식이 끊긴 채 사는 랜딘 주민들은 거듭된 사산과 유산으로 멸망해간다. 랜딘의 지도자 아가트는 길고 혹독한 겨울에 남하하는 약탈자들에 맞서 원주민 테바와 동맹을 맺으려 한다. 그러나 아가트가 테바 여인 롤레리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면서 서로를 경멸하던 두 종족 사이의 동맹이 깨지고, 약탈자 무리들이 들이닥친다.


아주 오래전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만 결말을 보지 못했던 만화가 있었다. 대부분 일본만화를 불법복제한 것이었고,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가끔씩 만화가게에서 정식 라이센스판으로 혹은 해적판으로 완결된 것을 본 경우가 있었다.

이제까지 기억에 남은 만화중에서 이런 것이 있었다.

높은 산 정상에 화려한 궁전을 짖고 사는 산의 종족이 있었다. 그 산 아래에는 수렵채집을 해서 사는 숲의 종족이 있었다. 산의 종족중에는 시조의 피를 이어받은 자중 유일한 자손인 고귀한 여인이 있었고, 숲의 종족중에는 용감한 청년이 있었다. 이 둘은 우연히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으나, 두 종족은 서로 경원하면서 가까이 하지 않는 사이여서 둘의 관계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여인은 고대의 예언에 나오는 시련의 시기가 곧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시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두 종족이 힘을 합쳐 남쪽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유배행성 뒤장에 쓰여진 문구에서 이 만화가 연상되었다. 책장을 펼쳐서 읽어 내려가면서 느낌이 왔고, 책장을 덮은 뒤에는 확신이 들었다. 그 만화는 유배행성을 본후 판타지풍으로 각색을 해서 그린것이 틀림없다. 무엇인가 빠진 것이 충족된 느낌이다.

하지만 추억이 없이 그냥 유배행성을 보았다면, 중편분량의 책을 단행본으로낸 출판사를 욕했을 것 같다.
by 서산돼지 | 2005/08/24 22:56 | SF시리즈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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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얼음칼 at 2005/08/24 23:51
르귄 별로야.
Commented by 희야 at 2005/08/25 10:52
말씀하신 만화는 나카야마 세이카의 '피어리 블루의 전설'(전2권)입니다. 82년 작품으로 되어 있네요. 우리나라에서는 대본소판으로 '푸른 매의 여왕', '지평선에 뜨는 별'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었지요. 그 외에도 속편 형식으로 해적판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제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 합쳐도 저 원작의 결말까지 내어주지는 않았고요.
Commented by 서산돼지 at 2005/08/25 23:01
얼음칼 > 여태까지 책중에 로케인의 세계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
희야 > 피어리 블루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읍니다. 속편의 끝이 아마도 이랬던 것 같습니다.
산의 종족의 여인이 두 종족간 수명의 차이때문에 청년이 늙어죽은 뒤에도 자신은 젊은 모습으로 남아서 혼자 있어야 한다는 두려움에 청년과 맺어지는 것을 포기하고 쓸쓸히 의자에 앉아있는 것으로 끝났지요. 어떤 미소(모래의 성)과 더불어 가장 기억에 많이 남은 만화입니다.
Commented by 희야 at 2005/08/27 13:17
대본소판은 결말이 그랬지요. 린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아이온을 거부하고 혈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탑에서 나온 동족의 순혈통 현자와 결혼하겠다고 하고, 그에 반발한 청년 아이온은 자신을 어릴때부터 좋아해온 다른 산의 종족의 귀족인 아자리아와 결혼하겠다고 눈물흘리며 선언하던가 그랬지요.
사실 아이온은 린의 조카인데, 그러한 근친혼 문제를 희석시키기 위해서인지 종족 차이만 유난히 강조하던 것이 거슬렸습니다.
Commented by 희야 at 2005/08/27 13:17
원작에서는 둘이 결국 맺어지지만, 그 후 린이 자신의 동생과 마찬가지로 고공에서 추락해서 (이 사고로 인하여 산의 종족이 숲의 종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아이온의 어머니가 산의 종족에게 죽었고, 이를 계기로 아이온과 린이 만나 린이 아이온을 키우게 되었지요. 결국 이 작품도 키워서 잡아먹기물의 일종이었던 것입니다) 죽지요. 그렇게 아이온을 먼저 떠나보낼 것을 두려워하던 린이 먼저 어이없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아이온은 차라리 자기도 죽게 해달라고 절규하면서도 차마 죽지 못하고, 훗날 겨울이 닥쳐오는 가운데 린의 말(자신이 없어도 세상은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던가 그런 취지의 말이었지요)을 쓸쓸히 되새기며, 양 종족을 이끌고 남쪽으로의 먼 여정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끝납니다.
Commented by 희야 at 2005/08/27 14:35
방금 생각이 났는데, 린은 혈통보존이란 명분으로 위와 같이 탑의 현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서, 양 종족간의 결속을 위해 아자리아와 아이온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제안하였지요. 아이온도 반발하고, 아자리아도 린을 비난하면서 네가 그런 식이면 아이온은 내가 차지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워낙 좋아하며 봤던 만화라 반가와서 두서없이 떠들게 되었습니다 - 그러고보니 이때부터도 판타지를 좋아했었나봅니다.
Commented by 서산돼지 at 2005/08/28 08:10
희야 > 저도 무척 좋아했던 만화입니다. 유배행성과는 달리 결말이 비극적으로 끝났군요. 재간되어 나오면 꼭 보아야겠읍니다.
Commented by 웰니스 at 2005/09/01 21:56
즐감하고 댕겨갑니다. 발자국도 "꾸~욱" 남기고..........항상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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