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워윅성
영국에 와서 지내게 되니 아무래도 영국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될 기회가 많이 생깁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은 시간이 없지만 토요일, 일요일은 자유시간인 관계로 이곳 저곳 성이나 저택을 구경 다니면서 영국귀족과 젠틀리들의 생활에 대해서 조금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궁궐이 있지만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빈집입니다. 베르사이유궁을 가보았지만 그 곳도 역시 주인은 없는 그냥 구경거리입니다. 그런데 영국의 성과 저택은 대부분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는 곳이 많고 손때가 묻어있어서 규모와 화려함은 대륙의 왕가와 귀족의 궁이나 저택보다 어떨지 모르지만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생기를 느낄 수 있어서 감이 보다 생생하였습니다.


< 공중에서 본 워윅성입니다. >

제일 먼저 가본 곳이 옥스포드 근처에 있는 워윅성이었습니다. 정복왕 월리엄이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런던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성을 세워 방비를 튼튼히 하는데 그 당시 세워졌던 성입니다. 서남부에 위치한 런던에서 미들랜드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목재로 성벽을 쌓는데 후일 석재로 바뀌고 여러 망루를 세운 중세의 요새가 되었다가 근대에 들어와 성주가 거처하는 저택을 증축하고 정원을 가꾸어 아름다운 전원주택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워윅백작이 영국역사상 여러 차례 벌어진 내전과 권력투쟁에 깊숙이 관여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듣는 것도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운 좋게도 아니면 백작의 뛰어난 정세판단으로 승자의 편에 든 적이 많아서 아직까지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성으로 남아있습니다.

성은 완만한 구릉으로 이루어진 미들랜드에서 약간 높은 구릉 위 세워져 있습니다. 사진 좌상 단에 있는 저택 뒤로 에이번강이 흐릅니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 세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랫포드 어폰 에이번(에이번강가에 있는 스트랫 여울이란 뜻을 갖고 있답니다)이 나옵니다. 구릉은 옆으로는 에이번강을 끼고 있어서 접근하기 곤란하고 사진 우측 상단에 있는 구릉위로는 우뚝 선 작은 봉우리가 있어서 봉우리를 중심으로 성안에 또 하나의 성-아성 혹은 keep이 있는 형태입니다. 아성 위에 서면 미들랜드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이 군사적 요새로서의 지리적 이점을 한 눈 에 알 수 있습니다. 올라가서 보니 성벽의 제일 아래 있는 돌은 정말 오래된 돌이었습니다..

사진의 왼편으로 보이는 것이 최초에는 강변을 끼고 쌓은 성벽이었다가 후일 그레이트홀과 스테이트룸 등이 추가로 건설되면서 본관으로 바뀐 워윅백작이 거주하는 저택입니다. 저택 오른 쪽에 작게 보이는 타워는 워윅백작이 종복에게 살해된 후 그 뒤로 유령이 되어서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고스트타워입니다. 오른쪽으로 언덕위로 보이는 것이 최초의 성이 서있던 아성입니다.
그레이트 홀에는 역대 백작들이 착용하던 중세시대의 갑옷과 역대 백작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주위로 백작과 그 가족이 살던 스테이트 다이닝룸, 예배당, 화실이 세 개인가 4개가 있고, 앤여왕이 워윅성을 방문할 때 머물기 위해 만든 앤여왕의 침실에는 윈저성에서 옮겨온 여왕이 쓰던 침대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왕의 방문은 취소되었지만 침대를 백작에게 선물로 주었답니다. 그 옆으로는 백작부인의 침실, 흡연실, 도서실, 음악실, 탈의실 등이 있는데 빅토리아여왕 당시 프린스 오브 웨일즈(왕세자)가 자주 놀러왔던 그때를 기념하여 당시 워윅성에서 자주 어울렸던 명사들의 실물크기 밀랍인형들이 있습니다. 당시 워윅백작가는 영국에서 손꼽히던 명문귀족으로 주말이면 빅토리아여왕의 왕세자이며 후일 대를 이어 영국왕이 된 에드워드 7세가 자주 놀러와서 아예 방 한 개를 왕세자 전용방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백작부인은 데이지라는 여성인데 처녀시절 런던의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입니다. 빅토리아여왕이 며느리 감으로 찍어둘 정도였는데 당대 백작이 한눈에 반해서 정열적인 구애를 해서 20세 때 백작한테 시집을 왔다고 합니다. 당시 데이지백작부인의 시어머니도 빅토리아여왕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고 하니 대단한 명문가문임에는 틀임없었던 것 같습니다. 워익성에서 남쪽으로 10킬로쯤 가면 세익스피어의 고향이 나오고 그 밑으로 조금만 가면 처칠의 종가인 블레하임궁이 나옵니다. 젊은 시절 처칠도 워윅성에 자주 놀러 왔다고 합니다. 데이지부인은 결혼 후에도 사교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어서 많은 명사들이 군사요새에서 아름다운 저택으로 바뀐 워윅성의 주말파티에 놀러 왔다고 합니다. 음악실과 그 옆에 있는 흡연실에 있는 밀납인형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놀랄 지경입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당대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이고 노래를 하는 사람은 로얄 오페라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던 여가수입니다. 앞에 의자에 앉아서 잡담을 나누는 사람은 데본셔백작부인과 처칠의 어머니입니다. 흡연실에는 처칠의 큰 아버지인 말보로공작과 에드워드 7세의 둘째 아들이며 후일 조오지 5세로 즉위하는 요크공작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인도 세포이반란을 진압하고 영국군 최고사령관을 역임한 로버트원수가 넥타이를 매고 있습니다. 이런 쟁쟁한 귀족들이 모여 주말파티를 하면서 놀았으니 저택의 화려함은 극에 달했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주에 방문한 차트워스 하우스는 이런 워윅성을 오두막같다고 생각하게 했으니…..

다른 한편으로는 장미전쟁 당시 헨리 6세와 에드워드 4세를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던 데빌백작이 군사를 일으키는 장면이 역시 밀랍인형으로 재현되어있습니다. 데빌백작은 두 번에 걸쳐 왕을 세워서 별칭이 king maker라고 불리운다나요. 후일 권세를 잃게 되자 반란을 일으키는데 에드워드 4세의 군대에 패하여 참수를 당하고 백작의 칭호와 성은 왕가에서 몰수를 하였습니다.



사진 왼편 아래쪽에 있는 성문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서 첫 번째 성문을 부수더라도 바로 또 하나의 문이 있고 문 위에서 끓는 물을 부을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성문 좌측 볕에 무기실이 있었는데 정복왕 월리엄시절부터 19세기에 이르는 각 시대별 무기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습니다. 평범한 라운드 쉴드에서 파비스 쉴드로, 가죽 갑옷에서 메일을 거쳐 플레이트로 발전하고 검도 단검에서 장검, 바스터드 소드, 활도 롱보우, 크로스보우 등등이 엄청난 수량이 전시되어있습니다. 디아블로를 오래하였지만 게임에서 나왔던 무구류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특이한 올리버 크롬웰이 쓰던 투구도 있고 크롬웰의 데드마스트 진본도 있었습니다. 총과 대포류도 많이 있었고 도 세포이반란에서 쓰던 무기도 있었습니다. 무기들을 사용하는 방법과 재현장면을 비디오로 볼 수 있었습니다. 초창기 총사(소총수라고 해야 하나요)들이 가장 즐겨 쓴 무기는 무엇일까요 라는 질문이 나와는 데 답은 총을 곤봉처럼 휘둘러서 상대방을 때렸다 입니다. 초창기라서 발사속도도 늦고 총검을 장착하는 것이 개발되기 전이었나 봅니다. 바로 그 밑층에는 중세시대의 고문기구들이 전시된 방이 있었습니다..

성주는 대부분 워윅백작이었지만 백작가는 한 가문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대부분 3-4대를 넘기지 못하고 자손을 보지 못해서 조카가 상속하던가 사위한테 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상속인을 찾지 못하여 국왕에게 성과 백작의 칭호가 반납된 적도 여러차례있습니다. 그러면 국왕은 다른 귀족이나 총신에게 다시 백작의 칭호와 성을 하사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1000년 동안 9가문이 워윅백작의 칭호를 세습하였습니다.

첫 번째 워윅백작은 정복왕 윌리엄을 따라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앙리 드 보몽입니다. 이 사람이 처음으로 워윅성을 쌓은 사람인데 백작의 칭호와 뉴버르라는 성을 하사받습니다. 뉴버르가의 5대백작인 토마스가 후계자없이 사망하여 성과 재산은 토마스의 누이인 마가렛에게 상속되는데 마가렛이 존 뒤 프레시스와 결혼하여 이 사람이 워윅백작이 됩니다. 이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마가렛의 사촌이 윌리엄 모뒤가 상속을 받습니다. 월리엄 모뒤가 백작이 되었을 때 국왕이었던 헨리 3세와 귀족들간에 심각한 대립이 발생합니다. 이때 그는 국왕의 편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불과 8킬로 미터 떨어져있는 케닐워스성의 성주인 레이스터백작 시몽 드 몽포르는 반대파의 수장이었습니다.. 시몽은 야습을 하여 몽뒤와 백작부인을 사로잡고 몸값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1264년의 일입니다. 몇 년 후 모뒤가 또 휴계자없이 사망하게 되어 그의 조카인 월리엄 드 보샴이 워윅백작을 계승합니다. 월리엄은 에드워드 1세밑에서 주요 군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그의 아들인 기는 당대의 세도가로 성장합니다. 당시 귀족들과 국왕간에 또 갈등이 발생하는데 에드워드 2세의 총신이자 애인인 피에르 가베스통이 귀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됩니다. 기는 피에르를 워윅성으로 잡아와서 대연회실에서 재판을 하고 성밖에서 목을 베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인지 이 사건이 있은 지 3년 후인 1315년 기가 죽자 국왕은 기의 아들 토마스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1329년까지 백작 위를 승계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전쟁에 들어갑니다. 토마스는 크레시전투와 포이티에전투에서 무훈을 세워 최초의 가터훈작사(에드워드 3세가 만든 영국 최고의 훈장)에 봉해집니다. 토마스는 후일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요절하여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함)의 군사고문관으로 활동합니다. 토마스의 아들인 토마스 younger 당시 다시 왕과 귀족간의 갈등이 발생하는데 토마스 younger는 다른 4명의 대귀족과 힘을 합쳐서 리처드 2세를 강압하여 왕의 총신을 내쫓고 일부는 처형해버립니다. 이 일을 1388년 Merciless Parliament이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1397년 정국이 국왕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국왕은 1388년 사건의 주범을 반역죄로 체포합니다. 토마스 younger는 귀양을 가고 워윅성은 몰수를 당하게 되지요. 그런데 1399년 헨리 볼링브르크가 리처드 2세를 쫓아내고 헨리 4세로 즉위를 하게 됩니다. 토마스 younger는 작위와 성을 되찾게 되지요. 그 다음대인 리처드는 아마도 역대백작 중에서 가장 혁혁한 이름을 드날린 사람일 것입니다. 때는 백년전쟁의 막바지였는데 그의 능력을 높이 산 헨리 5세는 후일 헨리 6세가 된 왕세자의 교육을 리처드에게 맡깁니다. 리처드는 1431년 프랑스에 밀려 대륙에서 마지막 남은 영국의 영토인 칼레를 수비하는 지휘관으로 활동하는데 이때 잔다르크를 몸값을 주고 사서 루앵의 시장 터에서 화형에 처합니다. 한편으로 전공을 세우면서도 전리품을 챙기는데 게을리하지 않아서 막대한 재산을 모으게 되고 그 돈으로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게 됩니다. 다음 대 백작인 헨리는 헨리 6세의 참피온입니다. 왕의 참피온이란 국왕의 즉위식때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랜스와 검으로 무장을 하고서 대관을 하기 직전 관중을 향해 왕위계승에 이의가 있는 사람은 나와라 하고 3번 외치는 사람입니다. 만일 나오면 왕위계승자를 대신하여 이의를 제기한 사람과 결투를 한다는 것이지요. 결혼식때 이의있는 사람 나와라고 하는 경우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만 그때 나온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요? 이 왕의 참피온이란 직책은 19세기 초반 폐지되었다고 합니다만 대단한 영예를 가진 자리인 것 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1445년 헨리 6세는 헨리를 워윅공작으로 승급을 시킵니다. 하지만 다음해 헨리가 사망을 하였고 그에게는 어린 딸밖에는 없었는데 딸마저 5세 때 사망하게 되어 보샴가문의 대가 끊어집니다. 그래서 백작령은 헨리의 여동생인 앤에게 승계됩니다. 몇 년 후 앤은 리차드 네빌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킹메이커로 이름 높은 네빌입니다. 네빌이 1471년 바넷전투에서 패해 네빌이 참수당한 후 에드워드 4세는 성과 토지를 몰수해서 동생인 클로랜스공작인 조오지에게 하사합니다. 조오지는 한때 네빌과 동맹관계를 맺은 적이 있어서 충성심이 의심스러웠는데다가 왕위찬탈을 노리고 있다는 의혹마저 사게 되어 1478년 처형됩니다. 클로랜스공작의 처형 후 백작칭호는 클로랜스공작의 아들인 에드워드에게 계승됩니다만 성은 에드워드 4세의 또 다른 동생인 리차드에게 넘어갑니다. 에드워드는 마지막 남은 플랜테지네트왕가의 왕자였고 당연히 후일 장미전쟁이 종료된 후 왕위를 계승한 튜터가의 입장에서 보면 정통왕위계승자로서 잠재적인 라이벌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헨리 7세가 왕위를 계승한 1485년 에드워드는 런던탑에 유폐되었고 1499년 왕위참칭자인 퍼킨 워백과 함께 처형됩니다. 에드워드에게는 상속인이 없었던 관계로 워윅백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지상에 한명도 남지 않게 되었고 성을 상속 받은 리처드는 1483년 리처드 3세로 즉위하게 되어 백작령은 왕가의 소유가 됩니다. 성을 물려받은 헨리 8세(왕비가 6명이나 되는 대단히 유명한 왕이지요)는 성벽을 강화합니다.
세월은 흘러 헨리 8세가 죽고 에드워드 6세가 9살이란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유왕의 치세를 돕는 근왕파( protectore )의 일원이었던 존 두드리에게 워익백작의 칭호를 하사합니다. 신임백작은 대단한 권세를 누리지만 어린 국왕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입지가 튼튼하다고 할 수는 없는 처지였습니다.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급서하자 다음 왕위는 국왕의 여동생인 메리에게 전해지게 되고 백작은 실각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백작은 전 국왕이 임종시 처제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전하라고 유언했다면서 궁중쿠데타를 일으킵니다. 2주후 정통왕위계승권자임을 주장하며 런던에 입성하는 메리 투터에게 런던시민은 만세를 외쳤고 존 두들리와 그의 아들 길포드,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반역죄로 처형을 당합니다. 워윅백작의 칭호는 다시금 왕에게 귀속되지요. 블러디 메리(메리 투터는 열성적인 카톨릭으로 개신교도를 무참하게 처형했지요)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1세는 1566년 두들리가의 일원인 암브로즈에게 백작칭호와 영지를 내립니다. 그러나 그 역시 아무런 상속인을 남기지 못하고 1590년 사망하여 영지는 다시 왕에게 돌아옵니다. 1604년 제임스 1세는 성을 푸트 그레빌경에게 하사합니다. 그러나 워윅백작의 칭호는 1618년 리치경에게 줍니다. 그레빌은 엘리자베스 치세때부터 공직에 있었고 제임스 1세의 치세때는 재무장관을 역임하였습니다. 1621년 퇴임시 왕은 그동안 그의 공적을 치하하면서 그를 브루크남작에 봉합니다. 1대 남작의 마지막은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불만을 품은 하인이 그를 살해합니다. 사진 중앙 위편에서 우측에 있는 아성과 저택 사이에 있는 조그만 타워가 바로 브루크남작이 살해 당한 고스트타워입니다. 남작의 칭호와 성은 양자인 로버트 그레빌에게 상속됩니다. 이때 청교도혁명이 발발하는데 로버트는 의회파의 지도자도 스태포드숴어와 워윅숴어지역 의회군 사령관에 지명됩니다. 1642년 여름 워윅성은 왕당파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로버트가 리치필드전투에서 사망하자 장남인 프란시스가 뒤를 이었지만 자녀가 없이 사망하여 둘째인 리처드가 상속을 받습니다. 리처드는 아버지와는 달리 1660년 차알스 2세의 왕정복고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리처드 역시 자녀가 없이 사망하여 셋째 아들인 풀크가 상속을 받습니다. 8대 브루크남작인 프란시스 그레빌은 1759년 리치가의 대가 끊어져 더 이상 워윅백작을 계승할 수 없게 되자 백작 위를 자신의 가문에 하사해줄 것을 청원하였고 청원이 받아들여져 다시 칭호와 영지가 일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워익백작은 부르크경이란 속칭으로 계속 불려졌습니다. 그의 아들인 조오지는 스테이트 룸을 개축하고 많은 그림과 조각을 사들여 저택을 장식하고 가든을 정비하였는데 열정이 지나쳐 재정난에 처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1804년 부동산을 매각할 수 밖에 없었다. 3대가 지나서야 네빌가는 재정난에서 벗어나 19세기말 프란시스 리차드 네빌과 데이지백작부인은 화려한 상류생활을 다시 즐길 수 있었습니다. 부부의 아들인 레이폴드는 후일 수상을 역임한 안소니 에든의 누나와 결혼을 했고 러일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하였으며 세계 1차대전에서 캐나다군 준장으로 참전하였습니다. 네빌가의 7대 백작인 차알스 기는 미첼 브루크란 가명으로 할리우드영화에 출연을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데이비드는 성을 타소그룹에 매각하였으며 1996년 데이비드가 사망한 후 기가 계승하였는데 호주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투소그룹은 보수공사를 한 뒤 1982년 성을 일반에 공개하였습니다. 현재 성은 투소그룹의 장기인 실물과 흡사한 밀랍인형을 전시하고 성안 뜰과 성밖 들에서 기사들의 마상시합을 벌이는 등 일종의 테마파트로 꾸며졌습니다.

사족 : 시간대별로 성안 곳곳에서 중세전투장면을 재현합니다. 아침에는 성문 앞에서 궁사가 나와 시험을 보이고 점심무렵쯤에는 성밖에서 기사들이 마상경기를 합니다. 오후에는 파이크병들의 집단전투와 보병의 전투가 있읍니다. 5월말에 3-4일간 잠깐 하는 행사인데 운좋게 구경갔던 날이 시작하는 날이었읍니다. 사진을 못찍었는데 마상경기중 종자로 나온 사람이 제대로 기사를 수발하지 못하니까 투구 하나 주고 방패를 들게한 다음에 울타리 위에 올려놓고 말타고 달려들어서 랜스로 방패를 가격하더군요. 그것도 여러번..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사들끼리 껄껄거리며 웃고... 그후 멍석으로 말아서 말뒤에 매달아서 마상경기장을 왔다갔다 합니다. 잔인해서 자리를 피해서 다음 장면들은 못보았읍니다

by 서산돼지 | 2004/08/28 15:59 | 구경 거리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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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마르스 at 2007/06/13 23:19
와, 여행 스케줄 짜는데 참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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