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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의 세계에서 퍼왔읍니다. 주소는 http://www.chogabje.com/board/board_read.asp?tablename=choboard&idx=5210&no=5104&curpage=6&searchkey=&searchregion=&how=
=================================================================================== 인천 공항에서 오전 10시30분에 이륙한 아시아나 여객기(에어버스)가 2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일본 東北지방의 가장 큰 도시 센다이(仙台)에 내렸다. 미야기縣의 센다이는 인구가 약100만 명. 한때 일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뽑힌 적이 있다. 센다이 근교에 마쓰시마(松島)라는 일본 3대 절경의 하나가 있다. 수백 개의 섬이 모여 있다. 센다이의 시립박물관에 가면 한 방이 온통 국보들로 꽉 차 있다. 하세쿠라 츠네나카(支倉常長)라는 일본 무사가 1613년부터 7년간 유럽을 왕복하면서 갖고 온 유물 47점이 3년 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하세쿠라는 일본에서 포교중이던 스페인 신부 소테로와 함께 범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지금의 미국 서해안에 기착한 뒤 다시 멕시코로 항해하여 아카풀코에 도착했다. 4개월이 걸린 대항해였다. 이들은 멕시코에서 배를 갈아타고 대서양을 횡단, 스페인에 도착했다. 일행은 멕시코를 떠난 지 여덟 달만에 마드리드에 나타나 펠리페 3세를 알현했다. 하세쿠라는 스페인에서 세례를 받은 뒤 로마로 간다. 1615년10월 하세쿠라는 로마의 성베드로 사원 광장으로 들어갔다. 축포가 터지는 가운데 기병이 안내하고 이 일본 사무라이는 말을 타고 들어갔다. 법왕청은 그를 잘 대우했다. 하세쿠라는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항해술을 인정받았고 반란군 토벌 때는 외교술을 평가받아 센다이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에 의해 사절로 발탁된 것이었다. 그해 11월 하세쿠라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했다. 그는 바오로 5세가 스페인에 부탁하여 멕시코와 센다이가 통상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세쿠라가 교황에게 제출한 서신에는 '奧州(지금의 동북지방)의 왕 伊達政宗'이란 표현이 있다. 당시 다테 마사무네는 막부의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신하로서 복종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王운운은 터무니 없는 과장이다. 교황측에서 다테 마사무네는 일국을 대표할 외교권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하세쿠라를 수행했던 스페인 선교사 소테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사무네公이 다음의 막부 장군이 될 실력자입니다. 지금 일본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30만 천주교도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를 것입니다" 이런 무엄한 말이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래 전해졌지만 도쿠가와는 모른 척해버렸다고 한다. 마사무네는 배를 만들 때부터 막부의 허가를 얻었고 막부의 선박담당자를 항해사로 초빙했기 때문에 반역의 의사기 있다는 오해를 받지는 않았다. 교황청과 하세쿠라의 교섭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일본에서도 1620년부터 막부에 의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센다이 시립박물관에는 하세쿠라가 가져온 성경, 십자가, 그림들이 있다. 하세쿠라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향하여 기도하는 초상화, 그에게 주어진 로마시민증서(羊皮紙에 금박글자가 쓰여 있다) 등은 國寶이다. 하세쿠라는 돌아오는 데 3년이 걸렸다. 그는 1617년 스페인의 세빌리아에서 귀국 길에 올랐다. 대서양을 건너 멕시코에,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에, 마닐라에서 센다이로 온 것이다.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한 지 약100년 뒤의 일이었다. 하세쿠라는 귀국한 2년 뒤 52세에 죽었다. 그의 아들은 천주교를 믿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그가 가져온 물건들은 압수되어 명치유신 이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하세쿠라를 수행했던 소테로 신부도 순교했다. 센다이를 큰 도시로 발전시킨 藩主(번주. 막부시대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의 숨결과 발자취는 이 도시 곳곳에서 살아 있다. 일본은 서구식 봉건제도를 거친 나라이다. 봉건제도란 영주가 번(藩)이란 영지를 거의 독립국가처럼 통치하고 다만 중앙정부인 幕府의 조정과 견제를 받던 제도이다. 이 제도하에서 영주들은 藩의 경제발전에 경쟁적으로 힘을 쏟았고 이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 약250년간 일본은 평화속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축적되고 단련된 지식, 國富, 제도, 민족성이 명치유신의 물적인 토대가 되었다. 일본의 지방에 가보면 그 지방을 번성케 했던 옛 영주(藩主=大名)를 기리는 기념관이 많다. 중앙집권적인 조선조下에서는 지방관리들의 독자성이 허용되지 않아 기억할 만한 인물들도 별로 남아 있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센다이에서는 '다테 오도코'라는 말을 쓴다. 다테 마사무네처럼 멋진 남자란 뜻이다. 그런데 다테 마사무네는 어릴 때 천연두로 오른쪽 눈이 실명된 애꾸였다. 그의 별명은 獨眼龍이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雄이 천하를 놓고 대결하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는 일본의 동북지방을 근거로 삼아 천하의 패권을 노려볼 만한 인물로 꼽히기도 했으나 결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1590년의 일이었다. 그 전해 마사무네는 지방 영주와 전투를 벌여 아이츠 지방을 손에 넣었다. 당시 이미 패권을 쥐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주들에게 전투금지령을 내려놓았었다. 이 명령을 어긴 마사무네에 대하여 히데요시는 지금의 도쿄 근교인 오다와라(小田原)까지 와서 해명하도록 명령했다. 마사무네는 잘못했다가는 목이 달아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上京 명령을 거부하고 싸울 것인가, 천하쟁투를 포기하고 복속할 것인가. 마사무네는 후자를 택했다. 오다와라에서 10만 대군을 이끌고 攻城戰을 벌이고 있던 53세의 히데요시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23세의 청년장군 마사무네의 목등을 막대기로 툭툭 치면서 "조금만 늦었더라면 여기가 위험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3년 뒤인 1593년4월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마사무네는 1300명의 부하병사들을 이끌고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에 상륙한다. 그 1년 전 임진왜란이 시작되어 약14만 명의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작전중이었다. 마사무네는 후방군수지원을 담당했다. 그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1차 진주성 싸움(1592년10월)에서 참패했던 일본군은 1593년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을 벌인다. "한 명도 살려보내지 말라"는 히데요시의 특명을 받은 일본군은 약9만 병력을 집결시킨다. 그 7년 뒤 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시대를 연 대결전 세키가하라 전투 때 東西 양군은 각각 9만을 동원했으니 진주성 공략에 히데요시가 얼마나 집착했는지 잘 알 수 있다.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이긴 일본군은 진주성 안에 있던 5만의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다테 마사무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소, 말, 닭, 개까지 남기지 않고 죽였다"고 한다<계속> =================================================================================== 2001년 일본배낭여행을 갔을때 센다이를 들렸읍니다. 마사무네가 센다이를 개척하였을때 쌀생산량인지 150만석이었는지, 마사무네가 받은 식읍이 쌀 150만석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규모에 매우 놀란 적이 있다. 영정조때 조선의 세곡이 200-300만석에 불과했는데, 일개 다이묘에 지나지 않는 자의 영지에서 150만석을 운운하다니! 한반도와 일본열도간의 세력균형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일찍 무너졌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매우 우울하였다. 조갑제의 글에서 그 마사무네 시절 일본은 유럽으로 사절을 파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을 떠나 태평양을 건너 마젤란해협을 지나 카리브해를 거쳐 대서양을 가로질러 유럽으로 갔다. 지난번 서양선박에 대해서 찾아볼때 이미 1607년 일본인 여러명이 포루투갈 선박을 타고 포르투갈에 갔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그들은 일본 말라카 인도 희망봉을 돌아 포르투갈로 갔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두무리의 일본인들이 하나는 동쪽으로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지구를 돈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근대이전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먼곳을 갔던 것은 혜초의 인도행이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에는 배가 난파되어 오끼나와 강남 대운하 북경을 거쳐서 귀국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아마 그 사람이 조선시대에 가장 먼곳을 갔던 사람인 듯 싶다. 세력과는 별개로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과 식견이란 면에서 우리는 일본인에게 수백년이 뒤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본과의 경제력차이가 몇년이니, 리가 일본에게 문화를 건네주네 이러면서 자위하고 있지만, 사실 일본은 이미 우리를 수백년이상 앞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늘 독도문제, 동해표기문제, EEZ문제 등 한일간의 국제법상 문제점을 다룬 양국 학자의 논문을 한데 모은 책을 보았다. 우리가 우리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논리와 증거에 못지 않은 주장과 사례를 일본학자들이 열거하고 있었다. 침울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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