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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살아있지만 이제는 거의 찾는 사람이 없는 하이텔 과학소설동
그곳에서 만났던 많은 분들을 이곳 얼음집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1월 중순 모임이 있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가질 못하였다. 밑의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듀나님이 쓰신 글이다. 그런데 곽동훈님이 이어서 글을 남겼고 이를 본 듀나님이 다시 글을 덧붙이셨다. 문제는 이 3편의 글이 같은 계시판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제목에 같은 단어가 들어 가지도 않기 때문에 당시에 이 글을 읽었던 사람이 아니고는 찾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고두고 읽기 위해서 두분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내 얼음집에 퍼왔다. 두분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리라 믿는다 ================================================================== 제 목:[창작] 파도바의 비너스 보낸이:이영수 (DJUNA ) 1995-12-15 20:25 조회:712 파도바의 비너스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작은 디스크를 하나 꺼내 홀로그램 뷰어에 집어 넣고 돌렸다. 잠시 뒤 방이 어두워지면서 121x183 센티미터 크기의 직 사각형이 허공에 떠올랐다. 화면이 점점 뚜렷해져 그 그림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되자 내 입안은 순식간에 바짝 말라붙고 말았다. "맙소사, 파브리군요!" 내가 외쳤다. "맞아요. 그의 작품이에요. " 그녀는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록에는 [잠자는 비너스]라고 나와 있죠. 하지만 우리는 지오르지 오네의 그림과 구별하기 위해 [파도바의 비너스]라고 불러요. 대영 박물 관에 소장되어 있는 파브리 자신의 목록에 따르면 [비너스]는 1489년 여름에 그려졌어요. 그의 목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 작품은 그의 또다 른 작품 [유디트]와 함께 1492년 4월 11일 파두아의 어떤 상인에게 팔렸 는데 그 이후 사라진 상태였어요. 한동안 존재 자체가 의심되기도 했지 만 1924년에 [유디트]가 발견되면서 이 작품도 어딘가 처박혀 있을 가능 성이 아주 높아졌어요. 그러다 바로 작년 12월 29일에 이 걸작이 우리 에게 넘겨진 것이죠. 일주일 뒤에 매스컴에 공개될 것이고 그 뒤에 소더 비 네트워크를 통해 경매에 붙여질 예정이에요. 원본은 지금 우리 회사 의 금고 안에 들어 있어요. 어때요, 감상이?" "이게 정말 진품입니까?" "그걸 확인하는 게 바로 우리 회사에서 하는 일이죠." "긍정적이었습니까?" "탄소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에 따르면 [비너스]는 15세기말에서 16세 기초에서 그려졌어요. 적어도 그려진 뒤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이야 기지요. 물감의 종류도 조사해 보았어요. 역시 당시의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진품이겠군요." "당신처럼 쉽게 결론을 내리면, 우린 일 년도 못 가서 망해요. 탄소 동위원소 측정법 쯤은 누구나 쉽게 속일 수 있어요. 솜씨 좋은 위조범이 라면 당시에 만들어진 판자나 캔버스를 이용해서 그럴싸한 작품을 만들 어 내지요. 19년 전에 일어났던 가짜 페르메르 소동을 기억해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1998년에 구입한 두 점의 페르메르가 모조리 위 조로 밝혀졌지요. 그들이 연대측정도 안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여러 가지. 우선 화풍과 서명을 조사해 보았어요. 미술 전문가들의 애매 모호한 의견들만 의존하지 않고 새로 개발된 미술 통계학적인 방법 까지 동원했어요. 결과는 97% 진품이었어요. [모나리자]도 92%에 불과하 다는 것 알아요? 또 지문이 있어요. 고맙게도 파브리는 물감을 손으로 문지르는 버릇이 있었죠. 조사 결과 그의 왼손 검지와 장지, 오른손 검지와 엄지의 지문 이 남아 있었어요. 양손을 다 쓰는 파브리의 화법과도 일치했고요. 뢴트겐선과 그 밖의 투시법으로 그림을 조사해 보았어요. 한 번 보겠 어요?" 그녀는 뷰어를 조절했다. 그림 위로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물감 아 래 숨겨져 있는 몇몇 형상들이 보였다. "저건 뭡니까? 사티로스?" 내가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님프와 사티로스, 아니면 잠자는 안티오페를 훔쳐보 는 쥬피터 쯤 되겠죠? 하지만 사티로스는 사라지고 잠든 여인만 남았죠. 그녀의 발 옆에 잠들어 있던 큐피드 역시 사라졌고요. 나중에 의도가 바뀌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안티오페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요. 하여간 작업 순서는 파브리의 다른 작품과 일치 해요. 잦은 번복도 마찬가지 고요. 그림의 소재가 당시의 것이라기보다 는 베네치아 파나 플랑드르 파의 것에 더 가깝지만, 파브리는 언제나 자 신의 시대와는 약간 어긋난 사람이었고 또 언제나 앞서가는 사람이었죠. 결국 우리는 [파도바의 비너스]가 진품이라고 보고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투시도를 지우고 원화를 다시 비추었다. "만약 이것이 진품이라면 정말 흥미로운 작품이겠군요." 내가 말했다. "장르의 시작이 아닙니까? 지오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가 몇 년도 작품이죠?" 그녀가 대답했다. "대략 1510년경이죠. [파도바의 비너스]가 20여 년이나 앞서요. 하지 만 두 작품은 분위기부터가 틀려요. 티치아노나 지오르지오네의 그림과 는 달리 [파도바의 비너스]는 음산하고 어둡죠. 일반적인 나부상에서 느 낄 수 있는 관능적인 색채는 파브리의 그림에는 없어요. 이 그림에도 어 딘가 죽음의 냄새가 풍기지 않아요? 잠들었다기보다는 죽은 듯한, 시간 의 무게 속에 갇혀 있는 듯한 답답한 느낌을 나만 느끼고 있나요?" "맞아요. 바로 그것이 파브리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별로 인기가 없었죠. 그의 작품들이 19세기가 되어서야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유도 거기 있어요." 나는 항의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에도 위대한 화가였습니다. 바사리도 그를 레오나르 도 다 빈치 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었지요. 카라바치오부터 피카소에 이 르기까지 후대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도 대단하고요. 19세기부터 올라간 것은 그의 그림 값이지..." "맞아요. 정말 대단하게 뛰었죠. 게다가 흥미롭게도 19세기에 와서야 사라진 그림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줄지어 세상에 나왔지요. 그것도 진짜 걸작들이 말이에요. 신기하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졸린 듯한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한가하게 이마 위 로 내려온 머리를 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파브리가 그린 잠자는 여인 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 항의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포기하고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 말이 맞았다. 파브 리의 그림에는 죽음의 냄새가 풍긴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그림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시대의 사생아였다. "부서진 벽들과 기둥...... 이 작품에서도 파브리는 이것들을 그려 넣 었어요. 로마 시대의 쓰레기들에 대한 집착 역시 당시의 유행에서 약간 벗어나 있죠. 언제나 파브리는 약간씩 앞서갔어요. 그가 그린 그림들 중 여럿은 장르를 새로 연 작품이었죠." "그는 천재였으니까요." "오히려 미래의 미술사에 도통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가 점쟁이라도 되었단 말입니까?" "그렇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여간 재미있죠? 그가 그린 여자들은 상당 히 현대적이에요. 예를 들어 2003년에 발견된 [레다와 백조]를 봐요. 현 대성이 지나쳐서 심지어 패션 사진처럼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레다와 백조]는 가벼운 패션 사진에 비교할 수 없는 걸작입 니다! 비유가 지나쳐도..." "난 사실을 말한 거예요. 헬무트 뉴튼이 보그 지를 위해 찍은 사진 중 에서 그것과 거의 흡사한 구도의 사진이 있어요. 물론 뉴튼 사진의 양 식화된 포즈와 [레다와 백조]의 격렬함은 비교할 수 없죠. 전혀 다른 종 류의 것이니까요. 하지만 포즈가 흡사한 것은 사실이에요. 누가 베꼈을 까요? 뉴튼? 그는 파브리가 그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그 렇다면 파브리?" "파브리가 어떻게 뉴튼의 사진을 베꼈겠습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빌려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요? "왜, 안되나요?" "당시엔 타임머신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없는 것은 마찬 가지고요!" "하지만 앞으로는 모르죠. 지금도 시간 여행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 라는 걸 알아요? 내년쯤에 목성 괘도에서 실험할 거래요. 이론상 0.4초 정도쯤은 과거로 갈 수 있다는군요. 미래에 그것보다 싸고 간편한 타임 머신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만약 파브리가 르네상스 시대로 간 미래인이라면 뉴튼의 사진을 알고 있었겠지요. 뉴튼의 사진 말고도 카라바치오나 피카소도. 하지만 그 자신의 존재 역시 역사를 바꾸는데 참여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역사를 바꾸기 전의 서구 미술사를 장식했던 우리가 모르는 거장들의 우리가 모르는 작품들을 베꼈을 수도 있겠죠. 그러고 보니 헬무트 뉴튼과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겠네요. 그렇다면 뉴 튼이 미래로 가서 파브리 것을 베꼈나??" "하,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진짜 믿고 계시지는 않으시겠지요?" 나는 흥분으로 말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천만에요. 난 내 직업에 대해서는 농담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근거가 있습니까?" 그녀는 서랍을 다시 열고 그 안에서 작은 파일 첩을 꺼냈다. "우리는 최근에 새로운 검사 방법을 도입했어요. 이 방법은 특히 [파도 바의 비너스]와 같이 나무 판자 위에 그려진 그림들의 연도를 추정하는 데에 참고가 되죠. 알다시피, 나무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예요.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끊 임없이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요. 주변 물질을 흡수하기도 하고, 추운 날씨 때문에 움츠러들기도 하지요. 우리의 새 기술은 이 나무의 성분과 성장 속도를 연구해서 판자가 어느 시대 것인 지를 추정해 내요. 우리는 이미 마사치오와 벨리니가 그린 그림 몇 점을 가지고 그 정확성을 확인했 어요. 탄소 측정법 만큼 쓸모 있지는 않지만 이미 추정 연도를 알고 있으 면 확인하는 데 도움은 되죠. 그런데 [파두아의 비너스]에서는 그 검사 결과가 아주 이상하게 나왔어 요. 우리는 그림이 그려진 나무 판자가 어느 시대의 것인지 전혀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그것은 추정 연대에 잘려진 나무가 아니었어요. 게다가 더욱 수상했던 것은 당시의 나무에는 포함되어 있을 리가 없는 몇몇 금속 과 화학 물질들이 발견된 점이었어요. 그 판자는 분명히 20세기 이후의 것이었어요. 게다가 그 판자의 처리 상태도 이상할 정도로 완벽했어요. 그렇다면 가짜일까? 하지만 그 작품이 파브리의 작품임은 분명했어요. 다른 방식으로 확인한 연도 측정법도 믿을 만 했고요. 그러니 그가 시간 여행자라는 가설이 나올 수 밖예요." "하지만, 파브리가 시간 여행자였다고 해도 그의 천재성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그림들이 걸작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말 그랬다면 그는 정말 교활한 사기꾼이지요. 생각해 봐요. 그는 공 정한 게임을 하지 않았어요. 그는 당시 사람들이 모르는 미술사 지식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고요. 기법이나 화풍, 미래에 존재하게 될 걸작들, 심지어 앞으로 어떤 그림이 유행할 것인지까지!" "그러나, 예술은 과학과는 다릅니다. 발전하는 것이 아니지요. 웬만한 미술 학도라면 컴퓨터로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장난 을 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런 작품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 란젤로의 작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아직도 그런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놀랍군요. 예 술이나 과학이나 따지고 보면 다 똑같은 인간 활동이에요. 둘 다 발전하 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지요. 단지 가치 평가 기준의 비 중이 다른 곳에 치우쳐 있을 뿐이에요. 미적인 가치를 따진다면 대통일이론이 나오기 전의 엉성한 양자역학보 다는 뉴튼 역학이 훨씬 더 아름다워요. 지금은 아무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그 체계가 완벽하고 훌륭하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어요. 그 가치는 불변이지요. 반대로 우리가 아무 리 이집트 시대 미술품의 아름다움에 열광한다고 하더라도 테크닉이나 그 림 재료와 같은 것들은 우리 시대의 것들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 또한 부 인할 수 없지요. 중세 회화들의 비현실적인 요소들은 정말로 성스러운 아 름다움을 낳지만, 그들이 그렇게 그린 이유가 그렇게 밖에 그릴 수가 없 었기 때문이었다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돼요. 아니, 잠시만 말 막지 말고 더 들어요. 문제는 예술이건 과학이건 그 두 요소들이 결합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어느 한쪽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어요. 성공한 과학 이론들이 대부분 미적으로도 아름답듯 이, 성공적인 수많은 예술 작품들은 테크닉과 미학의 발전사적인 면에서 도 주목할 만 해요. 파브리는 재능 있고 영리한 화가였어요. 그 점을 부인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그는 우리가 지금 평가하고 있는 것만큼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어 요. 파브리가 가장 높이 평가받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그의 진취성 과 독창성이라고요. 자, 생각해 봐요. 파브리만큼 영리하고 재능 있는 현 대의 화가가 현대의 모든 기법과 미술사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라파엘로 풍의 성모상을 그렸다고 쳐요. 당신은 그 그림을 나름대로 높이 평가할 수는 있어도 '독창적인 걸작'이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파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파브리가 우리가 모르는 그의 세계의 걸작들을 철저하게 표절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공정'하지 않았어요.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과의 경쟁에서 공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그의 시대의 화가들과의 경쟁에서도 공정하지 않았어요. 미래의 화가가 진지하게 르네상스 시대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래도 파브리가......" "아, 맞아요. 돈 문제도 있군요. 왜 하필이면 그의 최대 걸작들은 19세 기가 되고 나서야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을까요? 피카소나 앤디 와홀과는 달리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능력에 비해 큰 돈은 벌지 못했죠. 파브리는 그걸 벗어나려고 했던 거예요. [비너스]의 전 소장자에 관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도 사람이니까 호기심에서라도 경 매장에 직접 나올 지도 모르죠. 난 경매가 끝나기 전에 그를 한 번 만나 볼 생각이에요. 옛 시대의 거장을 만날 수 있는 극히 드문 기회니까요. 과 거와 미래의 미술사에 대한 근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예요. " "하지만 어떻게 그를 알아봅니까? 그리고 그가 자기가 파브리가 아니라 고 시치미를 뗀다면요?" 그녀는 웃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파브리의 초상화가 있어요. 게다가 그가 아무리 시치 미를 뗀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증거는 속일 수 없어요. 잊었어요? 지문이 있잖아요!" ---------------------------------------------------듀나와 그 일당들이 제 목:[창작] 파브리의 변명 보낸이:곽동훈 (vinophil) 1996-01-16 12:48 조회:196 파브리의 변명 어떤 경위로 20 세기말의 통신망에 저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 는지 알수가 없군요. 그것도 [파도바의 비너스]라는 제목의 '소 설' 형식을 빌어 저를 깍아내리는 글이 말입니다(모르시는 분은 이 게시판 3037 번 참조). 특히 미술사에 정통하지 못한 독자들 이 그 글을 본다면 제가 무슨 대단히 파렴치한 사기꾼이라고 생 각하지 않겠습니까? 네, 물론 인정합니다. 전 시간여행자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저처럼 시간여행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그 글의 진짜 필자의 표 현대로 어느 정도 '불공정한' 게임을 벌인 것도 사실입니다. 하 지만 제게도 할 말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당 하는 것 역시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이름모를 필자에게 아이디를 빌려주신 듀나씨를 비롯해 20 세기의 여러분들은 우리같은 현대인(혹은 미래인)들이 15 세기 유럽에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짐작이나 하십니까? 흔히들 '문화 의 차이'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하는 그 불편이 실제로는 스푼도 없이 칼과 손가락만으로 식사를 해야 하고(게다가 음식의 불결함 이란!), 언제 역병에 감염될 지도 모르고,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 면 어디에서나 설치는 강도의 손에 갑자기 희생될 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막상 작업을 시작 하려면 온갖 염료를 직접 손으로 갈고 배합하는 것이 결코 생각 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짐작하다시피 그 시대에서는 천애고아나 다를 바 없는 제가 온갖 재료들을 구하는 일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일에 조금 씩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만, 역시 그 시간이 란 것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도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테크닉의 문제도 집고 넘어가야하겠군요. 듀나라는 아이디를 빌린 그 이름모를 필자는 내가 '현대의 모든 기법과 미술사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작품을 그렸다는 가정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사실과 다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현대의 모든 '기법'이란 것이 현대의 '기술'과 분리된 것이 아니지 않습 니까? 간단한 예를 들자면, 저는 황갈색을 내기 위해서는 직접 오크르를 갈아 아마인유나 해바라기 씨에서 짜낸 기름을 섞어 써 야 했고, 색상의 미묘한 변화(당시에는 스푸마토라 불렀습니다 만)를 위해서는 저 역시 당시의 모든 화가들처럼 수없는 시행착 오를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오늘날의 화가들은 입맛 대로 준비되어 있는 물감들로 컴퓨터가 측정해낸 배합비율을 사 용하여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그런 점을 감안할 때 나는 바사 리가 '파브리의 스푸마토는 다빈치와 비교해도 결코 뒤처지지 않 는다'라고 평한 것은 자랑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미술사적인 지식을 동원해서'라는 부분만큼 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위 '장르 회화'에서 나의 독창성 이란 것이 바로 그 지식에서 기인한다는 사실도 솔직히 인정합니 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습니다. 관대한 용 서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된데는 그 이름모를 필자분도 짐작 했다시피 제가 물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 도 장르의 시작이란 건 희귀성 때문에 값을 더 받을 수가 있거든 요. 하여튼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제 작품을 위한 변명 한 가지 만은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아니 저와 제 작품이 뭐가 그 리 다르냐구요? 듀나라는 아이디를 빌린 그 분도 그렇게 생각하 시는 것 같은데, 저는 좀 다른 생각입니다. 그 분은 20 세기에서 도 그리 인정받지 못했던 소위 작가주의적 관점이라는 것에 지나 치게 매달려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작가와 작품은 다른 것입니다. 작품의 가치란 그 작가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어 떤 궁극적인 것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 작품 자체의 힘에 의 해 결정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작품의 의미는 작가가 무엇 을 시도했건 간에 궁극적으로 감상자와 작품 간의 커뮤니케이션 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분 말씀처럼 저 야 그리 위대한 인물이 아닐지는 몰라도, 제 작품이 많은 사람들 에게 감동과 영감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참, 여기서 바로 그 '작품의 의미'에 대한 보충설명이 하나 필 요한 것 같군요. 그 분은 [잠자는 비너스]의 표면 아래에 있는 그림이 '님프와 사티로스' 혹은 '안티오페를 훔쳐보는 주피터'라 고 추정하셨는데, 실은 '다이아나와 악테온'을 그리려다 만 것입 니다. 퐁텐블로 화파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지요. 하다못해 초승달이라도 하나 그려넣어 다이아나를 암시했어야 하는데, 제 가 너무 미완성인 상태로 중도에 그만 두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 를 산 것 같군요. 하여튼 보십시오. 그 분도 제 의도와는 다르게 작품의 의미를 추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경우는 미완성 상태에서 지워진 그림이지만 미술사에서는 완성본의 의미 역시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브론치노의 <비너스와 큐피드가 있는 우화>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피렌체의 코시모 1 세가 프란시스 1 세에게 선물하기 위해 주문한 것으로 예전에 는 <비너스, 큐피드, 우둔함 그리고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알려 졌었지요. 평론가들의 위대한 스승 바사리는 이 그림이 '관능적 쾌락과 그 표면 아래 도사리고 있는 많은 불특정의 위험들에 대 한 다면적인 우화'라고 복잡하게 표현했고, 근친상간을 뜻하는 그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단순히 매 독의 위험을 경고하는 그림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지요. 그런 데 결정적으로 제가 브론치노에게 그 의미를 물었을 때 그의 대 답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나도 모르네"가 대답이었습니다. 허, 참. 너무 이야기가 비껴나갔군요. 하여간 제 말은 제가 그 분이 말 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열한 사기꾼은 아니라는 겁니다. 또 저는 뭐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는 투의 칭찬은 걸맞지 않지만 나름대 로 나만의 세계를 지닌 화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분도 저 의 작품을 일컬어 '일반적인 나부상에서 느낄 수 있는 관능적인 색채가 없으며 죽음의 냄새가 풍기기까지 한다'라고 하면서 저의 독특한 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마저 '엘 그레코에서 베 낀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좀 섭섭할 것입니다. 덧붙여 말 하건대, 헬무트 뉴튼의 사진은 본 적도 없습니다. 대충 이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좀 흥분한 나머지 횡설수설하지 않았나 걱정이 되는군요. 하여튼 글을 끝내기 전에 제가 그 글을 쓰신 분이나 아이디를 빌려주신(그렇게 추정되는) 듀나 씨에게 별 유감은 없다는 점은 밝혀두고 싶습니다. 사실 저도 그리 자랑 할 만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 피 조금만 더 '공정'해주시길 부탁드리는 것 뿐입니다. 아니면 사기꾼의 비열한 변명이라고 생각하셔도 할 수 없겠지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냉정하게 읽어보시고 공정하게 평가해주십시오. 그 평가가 어떤 것이든 저로서는 감수 해야겠지요. 그럼 여러분들의 안녕을 빌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P.S.: 목성 궤도에서 실험한 그 타임머쉰은 일단 성공은 했습 니다만, 성공한 직후(아니 직전이라고 해야 하나요) 폭발하고 말 았습니다. 정확히 0.37 초 전의 과거로 가는 데까지는 성공했는 데, 바로 그 공간에는 그 타임머쉰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 니다. 아시다시피 한 공간에 아이덴티티가 동일한 두 물체가 존 재할 수가 없지요. 결과는 대폭발이었습니다. 하여튼 시간여행이 란 측면에서는 성공했다고 봐야겠지요. 제 목:[창번] 파브리 님에게...^^; 관련자료:없음 [1874] 보낸이:이영수 (DJUNA ) 1996-01-16 14:53 조회:333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 2067년 1월 4일 베네디토 파브리 귀하 바로 어제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서 귀하의 변명이 수록된 파 일을 받았습니다. 옛 시대의 한 거장이 몸소 저에게 변명의 편지 를 써 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답장을 받고 그냥 '그렇구나'하는 정도로 묻어둘 수는 없더군요. 우선, 나름대로 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 이 있으며, 둘째로--매우 말하기 껄끄럽습니다만--귀하의 변명 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평 론가가 아니고 미술사가입니다. 그것도 기법사가 제 전공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연구원에서 낡은 그림 이나 체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 중요한 대상은 미술사의 흐름입니다. 따라서 어떤 기법 이나 유파의 성격이 미술사의 한 흐름에 흘러들어왔다면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유파가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왔건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왔건 말입니다. 작 품 자체의 가치 평가는 사실 다음 문제입니다. 파프리 선생, 저는 귀하의 작품 자체의 가치를 깎아내리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독립된 예술작품으로서의 파프리의 작품들은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제가 관심을 쏟는 분야입 니다. 제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파브리의 작품들이 걸작일지는 모르나, 파브리라는 화가에 대한 현대 미술사가들의 평가는 과대 평가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귀하께서도 언급하셨지만 분명히 틀린 것입니다. 저 자신도 [파도바의 비너스]를 쓴 그 순 진한 기자 청년에게 이 차이를 설명하려고 무진 애를 썼었습니다. 저의 비판가들은 종종 제가 미술사를 스포츠 경주를 다루듯 한 다고 비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장르나 유파의 창조 와 같은 일은 힘들고 중요한 일이며, 만약 한 개인이 그런 업적 을 이루었다면 그 업적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두어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귀하가 몸소 서구 회화에 와 상의 장르를 첨가한 것이 아니라면, 저는 결코 그 공로를 지오르 지오네나 티치아노로부터 빼앗을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법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군요. 귀하는 시간여행 자들의 고충에 대해 긴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귀하가 예 방접종도 하지 않고 과거로 갔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15 세기의 이탈리아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다소 멋부리는 것처럼 보 일 지는 몰라도 포크 정도는 충분히 쓸 수도 있었을 겁니다(포크 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유행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건 정말 지엽적인 문제지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귀 하가 정말로 미래의 과학기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까? [비너스]를 그린 목판을 처리하는 데에도 분명히 미래의 기술을 동원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귀하가 쓰신 물감은 당시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배합하는 데에 레인보우 콜렉터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는지 저로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귀하가 밑그림을 그릴 때 홀로그램 아트 워크 머신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확신하지 못합니다(최근에 아도비 사에서 선보인 이 일체의 보조 기구들을 이용하는 데에는 핸드백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하드웨어로 충분합니다. 아마 미래에는 더 작아질 수도 있 겠지요. 지금 크기만 하더라도 여유없는 시간 여행자들이 충분히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정도가 아닌가요?)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제 추정에 불과합니다. 만약에 귀하가 정말로 미래의 테크놀로지를 거부하셨다면 귀하의 페어플레이 정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겠지 요. 언젠가 다시 만나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경매 때는 조금 서운 했습니다. D. G. (듀나 일당이 막 [파브리의 변명]을 읽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읽으면서 약간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파브리 의 변명]에서 파브리는 [파도바의 비너스]가 원래는 [다이아나와 악티온]을 그리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 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파브리는 자신의 목록을 가지고 있 었고 그 작품에 [잠자는 비너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이아 나와 악티온을 그리다가 나중에 수정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시 조금 이상합니다. 우선 악티온은 사티로스가 아닙니다(그려 진 그림이 안티오페라면 쥬피터가 사티로스로 변해서 그녀에게 접근했으므로 오해는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파브리는 발밑 에 큐피드를 그렸다가 지웠는데 설마 다이아나 옆에 큐피드를 그 릴 생각은 아니었겠지요. 시간 여행을 하는 동안 같은 물체를 만나서 폭발하는 이야기는 꽤 흔하지만, 설득력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SF라고 꼭 과학적 으로 꼼꼼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SF 독자들의 눈에 는 조금 거슬릴 수도 있을 것 같군요. 하여간, 유쾌한 글 감사합니다!) ---------------------------------------------------듀나 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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